Novel/[연재] 심장이 붉게 물들면

13화) 잠시 찾아온 평온

매냐씨 2026. 6. 29. 14:34

 

칼리스 부대의 야영지에 고요한 달빛이 드리웠다.

제국까지 앞으로 3.

부지런히 달리면 이틀이면 될 듯도 싶었다.

칼리스는 카시안과 함께 막사에서 밀린 서류를 정리하다 하이데벨 전령으로부터 온 메모를 발견했다. 

 

하이데벨의 잊혀진 마법사 중 한 명이 아스델에 도착했음

 

칼리스는 지도를 펼쳐 아스델을 찾았다.

마침 야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큰 일이지만, 황제의 눈을 피해 마법사를 꼭 만나야 했다.

제국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아스티나에게 왜 이토록 집착하는 건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디에나 역시 데려가야 했다.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 이상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제국까지 안전하게 가려면 의사 진료가 반드시 필요했다. 아스델은 규모가 큰 마을이니 디에나를 돌볼 유능한 의사가 있을 것이다.

 

카시안, 내일 오전에 아스델에 잠깐 다녀오겠다.”

? 지금도 많이 늦은 상황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재촉하는 서신을 두 차례나 보내신 걸 잊으셨습니까?”

칼리스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중요한 일이라 꼭 가야만 해.”

카시안은 불만스러운 눈빛을 비췄지만, 이내 수긍했다. 주군이 결심한 것을 쉽게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게다가 주군이 중요한 일이라고 하면 그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디에나 공주에게도 준비하라고 말해.”

디에나 공주님이요?”

그래. 의무병으로는 안 될 것 같다. 마을 의사에게 보여야겠어.”

카시안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를 떠나는 카시안을 확인하고, 칼리스는 전령의 메모를 다시 읽었다.

내일이면 많은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아침 일찍, 칼리스는 디에나를 말에 태우고 아스델로 떠났다.

주인이 없는 칼리스부대는 오랜만에 여유를 부렸다. 밀린 업무를 보거나 휴식을 취하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카시안도 오랜만의 시간에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공주님들은 근처에서 쉬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변을 산책하시겠습니까?”

여유가 생긴 카시안이 공주들에게 먼저 친절하게 다가갔다.

 

난 쉬고 있을게.”

아스티나는 혼란한 마음을 조용히 정리하고 싶었다.

카시안이 벨로나를 쳐다보자 한참 고민하던 벨로나가 입을 열었다.

난 좀 씻고 싶은데, 근처에 물가가 있을까?”

어젯밤 지나가다 본 호수를 떠올린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다오.”

씻을 생각에 들뜬 벨로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 그럼 나도 갈게."

혼자 남아 있기 싫었던 루에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카시안은 잠시 망설이다 두 공주를 에스코트했다. 카시안은 아쉬운 마음이 잠깐 스친 자신이 우스워 피식 웃어 버렸다.

 

 

*************************

태양빛을 머금은 호수는 잔잔하고 아름다웠다. 숲 사이로 스며든 바람에 수면 위가 은빛으로 일렁거렸다.

벨로나는 그 광경을 숨죽여 한참을 쳐다봤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이 연이어 덮쳐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지만, 눈앞의 풍경만큼은 잠시나마 냉혹한 현실을 잊게 만들었다. 세상은 여전히 이토록 아름다웠다.

 

“…너무 예쁘다.”

벨로나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감탄했다.

벨로나의 반응을 살피던 카시안은 그제야 어깨의 힘을 뺐다.

 

벨로나는 카시안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카시안. 이렇게 예쁜 호수를 보여줘서.”

카시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뭐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냥 지나가다 본 건데…”

원래도 미인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카시안은 괜히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 예쁜건가?”

호숫가에 쪼그려 앉은 루에나가 멍한 눈을 하고 손 끝으로 물을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카시안은 미간을 움찔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방금 전까지는 괜찮아 보였는데.

제 선택이 공주님에겐 불만족스럽군요.”

카시안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루에나는 움찔거렸다.

루에나가 겁에 질려 움츠릴 때면,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한 것 같아 카시안은 뒷맛이 씁쓸했다.

 

난 저기로 갈게.”

황급히 몸을 일으킨 루에나를 벨로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부축했다.

원래도 심약한 아이였지만, 요 근래 말도 없고 우울해보여 벨로나는 걱정이었다.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니야. 언니는 여기에 있어. 나 혼자 있고 싶어.”

루에나는 카시안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걸어갔다.

 

루에나가 멀어지자 벨로나가 눈을 흘기며 카시안을 쏘아봤다.

"넌 꼭 그렇게 말해야 직성이 풀리니?"

카시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요? 전 충분히 신사답게 대했습니다. 루에나 공주님께서 너무 예민하신 겁니다.”

루에나는 원래 그런 아이다. 네가 조금만 신경을 쓰면 될 일이야.”

제가 왜요? 헷갈리시는 것 같은데, 전 공주님들 시종이 아닙니다.”

카시안은 거칠게 나무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벨로나는 그가 화난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벨로나는 카시안이 자신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제국까지의 여정에 그가 없었다면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벨로나는 몇 번이나 주저하다 말을 골랐다.

시종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너에겐 항상 감사하고 있어.”

카시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십시오.”

거짓말이라니! 넌 속고만 살았느냐?”

, . 제 노고를 알아주시다니 소인 감개 무량합니다.”

카시안의 삐딱한 태도에 벨로나도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귀염성 없는 남자 같으니.

이만큼 굽혔으면 받아주면 될 것을.

 

벨로나는 카시안 쪽으로 호숫물을 쳐 보냈다.

-!  

! 지금 뭐하십니까!”

물벼락을 맞은 카시안이 깜짝 놀라 벨로나를 쏘아봤다.

하하하, 잘난 척하더니 꼴 좋구나.”

벨로나는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물을 쳤다.

-!  

그만하십시오.”

카시안이 물을 닦아내며 벨로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 마음에 안 드는 회색 눈.

입술을 질끈 깨 문 벨로나는 한 번 더 그에게 물을 힘껏 쳐 보냈다.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말 안 듣는 말괄량이 공주.

자신을 자꾸 흔드는 공주.

 

화난 카시안은 벨로나에게 성큼 다가갔다.

갑자기 그가 다가오자 벨로나는 긴장했다.

카시안은 주저하지 않고 벨로나를 번쩍 안아 들어 그대로 호수 안으로 던져 버렸다.

 

풍덩-!

상황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호수로 던져진 벨로나가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

벨로나는 화를 억누를 수 없어, 그를 향해 두 손으로 물을 쳐 보내며 소리 질렀다.

이 미친 놈아!!”

그 바람에 카시안의 온 몸이 물에 흠뻑 젖어버렸다.

그만 좀 하라고!”

분노한 카시안이 벨로나의 두 손을 힘껏 잡고 그녀를 노려봤다.

 

빛을 받은 초록빛 눈동자가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벨로나는 여전히 화가 난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젖은 드레스가 몸에 달라붙어 여인의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카시안은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치밀어 오르던 화가 이상할 만큼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떨림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차가운 호수에 들어가 있었는데도, 붙잡은 손만은 이상하게 뜨거웠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카시안은 자신이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손을 놨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냈다. 벨로나는 여전히 화가 식히지 않아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공주는 영원히 호수에 빠져 있을 것 같았다.

카시안은 못이기는 척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그러게 그만두라고 했을 때 그만 하셨어야죠.”

-!

벨로나는 눈을 흘기고는 카시안의 손을 쳐버렸다. 카시안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벨로나는 카시안의 기분을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이렇게 무안을 주다니!

감히 날 무시하다니! 얄미운 녀석.

벨로나는 젖은 드레스를 대충 몸에 두르고, 카시안을 무시한 채 물밖으로 나갔다.

카시안은 고개를 절레 절레 젓고는 그녀를 따라 나섰다.

물 밖으로 나온 벨로나는 물을 잔뜩 머금어 무거워진 드레스의 물기를 짜면서 루에나를 찾았다. 정신이 없어서 미처 몰랐는데, 그녀의 시야에 루에나가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두리번 거리던 벨로나가 마지못해 카시안을 불렀다.

카시안, 루에나가 안 보이는데?”

어디 그늘에서 쉬시나 보죠.”

심드렁하게 말하는 카시안을 쳐다보며,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루에나를 찾아와줘. 지금 당장.”

 

카시안은 어쩔 수 없이 루에나를 찾아 나섰다.

호수 근처를 살펴봤지만, 루에나는 보이지 않았다. 카시안은 슬며시 불안한 마음이 밀려 들었다.

카시안, 아직 못 찾았어?”

드레스의 물기를 대충 털어낸 벨로나가 합류했다. 카시안은 벨로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저었고, 벨로나는 금세 낯빛이 어두워졌다.

 

벨로나는 자꾸 루에나의 텅 빈 눈이 생각났다.

불안한 마음에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나쁜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어 더욱 열심히 루에나를 찾아 다녔다.

 

그때였다.

카시안은 호수에서 강으로 연결되는 깊은 어귀에서, 금빛이 요란하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카시안은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공주님!”

첨벙-! 첨벙-!!

카시안이 호수로 뛰어드는 소리에, 벨로나는 서둘러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카시안이 사라진 물 속에서 금색 실타래가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감청색 치마가 두둥실 떠올랐다.

 

벨로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하는 회로가 망가진 것만 같았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잠시 뒤, 카시안이 기절한 루에나와 함께 물 위로 떠올랐다.

그제서야 벨로나는 정신이 들었다.

 

“...루에나

벨로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루에나를 불렀다.

벨로나는 루에나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충격에 몸이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벨로나는 점점 다가오는 루에나의 새파란 얼굴을 보고는 결국 오열했다.

루에나!!”

루에나의 이름을 부르는 벨로나의 서글픈 목소리가 조용하던 야영지 위로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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