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한밤의 습격

쏟아지는 화살에 헤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슈웅! 카캉! 카캉!
귀를 찢는 쇳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놀란 헤스티아가 눈을 떠보니, 머리 위로 쏟아지던 화살들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발밑에 흩어져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눈으로 따라가지도 못한 사이, 수십 발의 화살이 흔적도 없이 잘려 있었다.
“영애, 괜찮습니까?”
“…네, 전 괜찮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그때, 수행원들이 모여들어 헤스티아 주변을 원형으로 에워쌌다.
“부대장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에르반님을 찾느라 늦었습니다.”
가쁜 숨을 정리하며 홀던이 말했다.
이안의 미간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래서 에르반님은?”
“무슨 실험을 한다고 검은과부거미 독을 드시고 쓰러져 있더라고요!”
이안은 제 귀를 의심했다.
“뭐? 그걸 왜 먹어?”
“제 말이요! 진짜 미친 거 아닙니까?”
에르반의 마법 능력이라면 방어막을 만들어 헤스티아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을 먹고 쓰러져 있다니.
이안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 있는데!”
“그쪽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라그리스가 바짝 붙어서 경호 중입니다.”
“젠장, 도움도 안 되는 녀석.”
거칠게 말을 뱉은 이안이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헤스티아 영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네!”
이안은 짙은 어둠 너머를 노려보았다.
시야가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졌다.
칠흑같던 숲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자, 나무 사이로 까마귀 가면을 쓴 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카라스군.”
“이놈들이 왜 여기에…?”
홀던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지하에서 뒤치다꺼리나 하던 놈들이 감히 황실을 노리다니!”
이안은 흑검의 손잡이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검신을 타고 푸른 기운이 서서히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검을 휘감으며 거세게 타올랐다.
홀던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수없이 보아 온 광경인데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푸른 아우라를 두른 흑검도, 그것을 손에 쥔 이안도 신화 속 존재처럼 느껴졌다.

“홀던, 준비됐나?”
“전 언제나 준비된 상태입니다.”
이안이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럼 시작해볼까?”
이안과 홀던은 순식간에 숲으로 내달렸다.
두 사람의 급습에 카라스들의 전열이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가장 뒤에 서 있던 사내가 검을 치켜들자 흐트러진 움직임이 빠르게 정돈됐다.
“죽여라!”
짧은 명령과 동시에 검은 그림자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걱!
흑검이 푸른 잔광을 남기며 허공을 갈랐다.
선두에서 달려들던 카라스의 목에 붉은 선이 그어지고 한 박자 늦게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쓰러지는 사내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뒤따르던 카라스가 급히 검을 들어 막았지만, 푸른 아우라를 두른 흑검이 그대로 검신을 튕겨냈다. 빈틈이 열린 순간, 이안의 검이 그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내의 몸이 축 늘어지기도 전에 이안은 흑검을 거칠게 뽑아냈다. 솟구친 피가 숲바닥을 붉게 적셨다.
챙! 챙!
이안은 뒤이어 날아오던 표창을 검등으로 흘려보내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쉴 틈도 없이 양옆에서 두 명의 카라스가 동시에 검을 매섭게 찔러왔다. 이안은 몸을 낮춰 검격을 피한 뒤 가장 가까운 사내의 허벅지 안쪽을 깊게 찔렀다.
“크윽!”
다리에 힘이 풀린 카라스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이안은 무릎 꿇은 사내를 어깨로 거칠게 밀어내며 길을 열었다.

카앙!
곧이어 날아오는 검격을 이안은 칼등으로 받아쳤다. 맞부딪친 검에 카라스의 팔이 크게 밀려났다. 그 순간 이안의 왼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스윽―!
뽑혀 나온 단도가 그대로 카라스의 손목을 깊게 갈랐다.
“흐헉!”
카라스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칼을 떨어뜨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안은 흑검을 사내의 몸에 박아 넣었다.
“여자를 노려!”
어둠 속에서 매섭게 울리는 명령에 카라스들은 일제히 헤스티아에게 달려갔다.
“이씨!”
이안이 다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흑검은 아직 쓰러진 사내의 몸에 박혀 있었다. 등 뒤에서 살기가 덮쳐왔다.
퍼억!
그때, 홀던의 주먹이 카라스의 얼굴을 그대로 강타했다.
"감히 뒤를 노리다니. 상도덕이 없구만."
홀던이 피식 웃으며 쓰러진 사내의 등에 칼을 꽂았다. 홀던의 발아래 쓰러진 사내는 몇 번 몸을 경련하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저한테 빚지신 겁니다.”
“이 정도를 빚이라 할 수 있나. 우선 이놈들부터 쓸어버리고 얘기하자.”
이안의 말은 가벼웠지만 홀던의 어깨를 움켜진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이안은 뒤를 돌아 헤스티아 주변을 살폈다. 헤스티아를 중심으로 부하들이 원형의 방어선을 만들고 있었고 카라스 몇 명이 그 틈을 뚫으려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 사이로 수십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번뜩이고 있었다.
이안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헤스티아의 방어선은 아직 건재했다. 반면 이쪽의 카라스를 놓아주면 곧바로 부하들의 후방이 무너진다. 판단은 길지 않았다.

이안은 흑검을 고쳐 쥐었다. 잠시 잦아들었던 푸른 아우라가 검신을 타고 다시 피어올랐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흑검과 달리 이안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홀던, 이번에는 끝까지 가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두 사람의 입가에 동시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다음 순간, 이안과 홀던은 기다렸다는 듯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푸른 검광이 어둠을 가를 때마다 검은 그림자가 하나씩 무너졌다. 이안은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칼날을 비껴내는 동시에 몸을 틀어 옆에서 달려드는 사내의 가슴을 베었다. 홀던 역시 그의 등을 노리는 적을 가차 없이 쳐냈다.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말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이안이 앞을 뚫으면 홀던이 뒤를 막았고, 홀던이 만들어낸 빈틈으로 이안의 흑검이 파고들었다.
카라스의 전열이 눈에 띄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그 사이 헤스티아를 에워싼 수행원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좌측 셋!"
캉! 카앙-!
"둘은 전진! 하나는 영애 곁을 지켜!"
자신을 촘촘히 에워싼 수행원들 속에서 헤스티아는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우측에서도 온다!”
카캉! 캉! 카앙!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쇳소리에 헤스티아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 순간, 문득 이안이 떠올랐다. 반드시 그가 무사히 돌아올 거라는 이상하리만큼 확고한 믿음이 피어올랐다. 그가 마력 충돌에서 자신을 구해 줬기 때문일까. 아니면 제국 최고의 검사이기 때문일까.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두려운 순간을 참고 견디다 보면 그가 자신을 만나러 올 것 같았다.
헤스티아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호흡을 고르며 버텼다.
“퇴각하라!”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카라스들은 서둘러 도망치기 시작했다.
“카라스가 도망친다! 모두 따라붙어!”
“포위망을 좁혀!”
헤스티아 곁에는 최소한의 호위만 남고 나머지는 달아나는 카라스의 뒤를 일제히 쫓았다.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검은 그림자들을 기사들이 빠르게 따라잡았다. 곳곳에서 짧은 비명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퇴로가 막힌 카라스들이 하나둘 숲바닥에 쓰러졌다.
이안의 눈이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번뜩였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이안과 홀던은 도망치는 카라스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홀던이 던진 칼이 그중 한 명의 팔을 스쳤다. 사내가 휘청이는 순간, 찢어진 소매 사이로 팔뚝이 드러났다. 방패 모양의 문신이었다.
이안의 시선이 잠시 문신에 머물렀다. 그러나 사내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짙은 수풀 너머로 몸을 던졌다. 그 의미를 곱씹어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달아나는 자들을 쫓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안은 문신의 형태를 머릿속에 새긴 뒤 다시 앞으로 내달렸다.

막다른 곳에 몰린 카라스 하나가 검을 떨어뜨렸다.
"살려…."
울컥.
말을 잇기도 전에 그의 가면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입을 벌려!"
홀던이 급하게 가면을 벗겨 턱을 잡아 벌렸지만 이미 늦었다. 입가에 하얀 액체가 묻어 있었다. 독이었다.
"빌어먹을."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붙잡힌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독을 깨물어 죽음을 택했다.
순식간에 숲은 적막에 잠겼다.
까마귀 가면을 쓴 시체들만이 숲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젠장."
이안은 낮게 혀를 차고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짧게 명령했다.
"시신을 전부 수습해라."
"생존자는?"
홀던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이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처음부터 죽을 생각이었군."
아, 헤스티아.
전투가 끝났음을 확인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녀였다.
서둘러 헤스티아의 곁으로 달려간 이안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영애는?”
“영애는 안전합니다. 많이 지쳐 보이셔서… 지금 마차에서 쉬고 계십니다.”
이안은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마차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똑. 똑.
“영애, 이안입니다.”
벌컥-!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차 문이 열렸다.
달빛을 따라 헤스티아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두 눈 가득 맺혀 있던 눈물이, 그를 확인한 순간 안도의 빛으로 일렁였다. 그제야 이안은 가슴을 짓누르던 긴장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영애…”
“...무사하셨군요.”
이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헤스티아가 그의 품에 안겨왔다.
당황한 이안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전투를 직접 본 건 처음이라...”
헤스티아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소공자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저 때문에 다치실까… 흑흑…”
이안은 헤스티아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영애, 이젠 괜찮습니다. 많이 놀라셨죠?”
“흑흑… 놀라긴 했는데… 그것보다 소공자님이 너무 걱정되어서…”
“제 걱정은 마십시오. 영애에게 이런 무서운 경험을 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안은 헤스티아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달빛 아래 맺힌 눈물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그의 눈에 새겨졌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손끝에 남아 있던 떨림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안은 천천히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녀를 감싼 손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불안해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한 일일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이안은 속으로 끝없이 되뇌였다.
-끝-